메이저리그 원년

메이저리그 원년


 

미국에 프로야구팀이 처음 생긴 것은 1869년이지만 보통 1893년을 메이저리그 원년으로 본다. 그 이유는 투수판부터 홈 플레이트까지의 거리가 오늘날의 18.44m(60피트6인치)로 정해진 해가 바로 1893년이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그 거리가 15.24~16.76m(50~55피트)로 불규칙했다.    스포츠중계

하얀 고무로 만든 투수판도 그 해 처음 도입됐다. 당시 투수판의 크기는 가로 12인치(30.48cm), 세로 4인치(10.16cm)였는데 요즘은 가로 61cm, 세로 15.2cm의 직사각형 고무판이 사용되고 있다.

1890년대에는 홈런이 많이 나올 수가 없었다. 투수판은 종전보다 훨씬 멀어지고, 공은 너무 말랑말랑했고, 외야 펜스도 멀기만 했다. 그래서 타자들은 다른 득점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선 정교한 타격이 두드러지는데 1893년부터 1909년까지 한 시즌  4할 이상을 기록한 것이 무려 11번이나 나온다. 도루와 '히트 앤런(hit-and-run)' 등 러닝 게임도 대유행이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스파이크를 앞세운 위험한 플레이와 험악한 거친 관중 매너 등 잰틀맨의 스포츠이던 야구의 전통은 크게 손상됐다.

1893년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신)가 86승43패로 우승했다. 그리고 1894년에는 리그 1, 2위 팀이 대결을 벌이는 포스트 시즌 시리즈가 탄생했지만 전혀 인기를 끌지 못해 4년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당대 최고 교타자이던 보스턴의 휴 더피는 현대 야구 최고 기록인 4할4푼을 기록했고,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89승 39패로 1894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네드 핸런 감독이 이끌던 오리올스는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최강팀으로 군림했지만 지저분한 야구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NL이 유일한 리그로 존재하면서 구단주들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졌다. 그 한 예로 1895년 뉴욕 자이언츠 구단주 앤드루 프리맨은 팀의 에이스이던 23승 투수 아모스 루시에게 당시로서는 정말 거액인 20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 이유는 단지 '성의 없는 플레이' 였다.

분노한 아모스는 아예 1896년 시즌을 보이코트 해버렸고,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스타 플레이어의 복귀를 원하는 NL의 다른 구단주들이 돈을 모아 3000달러를 루시에게 지불하면서 분쟁이 끝났다.

1896년 3년 연속 리그 챔피언에 오른 오리올스의팀 타율은 무려 3할2푼8리였다. 당시 오리올스에는 존 맥그로와 위윌리 킬러, 조 켈리 등의 뛰어난 타자들이 포진하기도 했지만, 거친 베이스 러닝과 심판의 눈을 속여 상대 주자의 다리를 걸거나, 유니폼을 잡는 등 치사한 '트릭 플레이' 로도 악명이 높았다.

오리올스와 함께 1890년대를 양분했던 강팀은 보스턴 브레이브스였다. (사실 당시까지 보스턴 팀의 별명은 빈이터스(Beaneaters)였다.) 브레이브스는 탄탄한 수비와 '히트 엔드'의 발명 등 다양한 작전으로 19세기의 마지막 2년 동안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00년에는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12팀이던 NL이 8팀으로 축소된 것이다. 볼티모어, 클리블랜드, 루이빌, 워싱턴 등의 팀들이 사라졌다. 8개 팀으로 구성된 NL은 그 후 50년 이상 이어진다. 브루클린 다저스는 28승을 거둔 에이스 조 맥기니티 등의 활약에 힘입어 82승 54패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제치고 20세기첫 우승을 차지했다.    무료스포츠중계

 

아메리칸리그(AL) 탄생


 

1901년 아메리칸리그(AL)가 탄생했다. 1900년까지 웨스턴 리그로 불리던 이 8팀 리그에는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에이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보스턴 레드삭스 등이 포함됐다. AL은 입장료를 NL(50센트)의 절반인 25센트만 받았고, 거액 연봉을 내세워 싸이 영, 나폴레온 라즈와, 휴 더피 등의 스타들을 영입하며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특히 엄격한 규정과 신사도를 앞세운 깨끗한 경기 운영으로 중산층 팬들의 인기를 끌었다.

1901년에 NL은 또 한 가지 중요한 규정을 만들었다. 첫 두개의 파울볼은 스트라이크로 인정한다는 규정이었다. 종전까지 파울볼은 볼도, 스트라이크도 아니었다. 그 해 나폴레온 라즈와가 4할2푼6리로 AL 타격왕에 올랐는데, AL은 여전히 파울볼은 노플레이로 규정했다.

AL과 NL의 라이벌 의식은 갈수록 치열해졌고, 1902년 NL은 펜실베니아 주법원에 고소해 필라델피아 에이스가 빼앗아간 스타플레이어 나폴레온 라즈와가 펜실베니아 주에서 뛸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당시 에이스의 감독이던 코니 맥은 라즈와를 클리블랜드 팀으로 보냈고, 그 후 13년간 라즈와는 클리블랜드의 최고 스타로 군림했다. 팬들에게 워낙 인기가 높아 팀의 별명을 그의 이름 나폴레온을 딴 클리블랜드 납스(Naps)라고 부를 정도였다.

 

최초의 월드시리즈 개최


 

1903년에는 근대 야구의 한 획을 긋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우선 NL이 마침내 AL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최초의 월드시리즈(World Series. 이하 WS)가 열렸다. AL 챔피언 보스턴과 NL 챔피언 피츠버그가 9전5선승제로 격돌했다. 시리즈 초반에는 피츠버그가 3승1패로 앞섰지만 보스턴은 4연승을 끌어내며 5승 3패로 첫 WS 챔피언에 올랐다.

같은 해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뉴욕시로 옮겨갔고, 유명한 영국 보병연대의 이름을 따 '하일랜더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러나 이 별명은 뉴욕시에 많이 살던 아일랜드계 시민들에게 전혀 인기를 끌지 못했고, '양키하일랜더스'로 별명을 바꿨다가 결국은 짧게 '키스'라는 별명이 정착했다. 20세기 최고의 팀 별명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1904년 신임 감독 존 맥그로가 이끄는 뉴욕 자이언츠가 NL 챔피언에 올랐지만 AL과의 월드시리즈를 거부해 버린다. NL이 원래 원조 리그인데 첫 WS에서 AL 챔피언이 우승을 차지하는 등 체면을 구기자 아예 WS를 보이콧해 버린 것이었다. WS가 열리지 못한 것은 1994년 선수 파업으로 취소된 것과 더불어 역사상 딱 두 번 뿐이다.

 




호너스 와그너

첫 월드시리즈에서 비록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1900년대 초반의 타격 스타는 호너스 와그너였다.

호너스 와그너의 야구 카드는 상태가 깨끗한 것이 사상 최초로 100만 달러 이상에 팔린 적도 있는 '야구 카드의 모나리자' 라고 칭송받는 희귀한 카드였다.

이 카드가 이렇게 희소가치가 높은 것은 와그너가 금연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창기 야구 카드는 담배회사의 홍보 수단으로 제작됐는데 와그너는 자신의 카드가 나오자마자 강력하게 항의해 거의 전량이 수거됐기 때문이다. 하도 오래된 이야기라 가설들이 많지만 어쨌든 와그너 야구 카드는 가장 희귀한 것으로 여겨진다. 1백만 달러를 넘는 가격에 팔렸던 공식 야구 카드 1호인 와그너 카드는 지난 2007년 9월에 280만 달러에 되팔리기도 했다.

1874년 2월 24일 피츠버그 인근에서 태어난 와그너의 별명은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이었다. 독일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더치맨'이었고, 그의 스피드가 너무 빨라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해서 '플라잉'이 앞에 붙었다.(9명이었던 그의 형제자매 중 5명만이 어린 시절을 넘겼다고 한다.)

12살에 학교를 중퇴한 호너스는 아버지와 형들을 도와 탄광에서 일하면서 여가가 나면 야구를 즐겼다. 그 중 3형제가 프로야구선수가 될 정도로 재능이 있었는데 어린 호너스는 이발사가 되려고 기술을 배우다가 결국 야구의 길로 들어섰다. 에드 바로우라는 스카우트가 호너스가 탄광에서 계곡 너머로 돌멩이를 던지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계약을 맺었다.

1917년까지 20년간 선수생활을 한 와그너는 명예의 전당 원년인 1936년 투표에서 95.13%의 득표로, 타이 콥에는 뒤졌지만 베이브 루스를 앞선 2위로 첫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5명 중 한 명이었다. (이들 외에 투수인 크리스티 매튜슨과 월터 존슨이 원년 멤버다.)

일반적으로 타이 콥이 '데드볼 시대(1920년대 이전 공의 반발력이 적고 스핏볼 등 다양한 변칙 투구의 개발로 투수들이 득세하던 시절)'의 최고 타자로 꼽히지만 와그너가 올라운드 플레이어로는 더 앞섰다는 주장도 많다. 특히 그는 야구 사상 최고의 유격수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는데 타이 콥 본인도 '어쩌면 호너스가 다이아몬드를 밟은 가장 위대한 스타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와그너는 마이너리그 팀을 거쳐 1897년 내셔널리그의 루이빌 콜로넬스에서 화려한 재능을 뽐내기 시작했다. 루키 시즌 61게임에서 3할3푼8리를 기록했고, 1900년 루이빌 팀이 사라지면서 피츠버그로 옮긴 뒤 3할8푼1리로 첫 타격왕에 올랐다.

오른손 타자였던 와그너는 그 후 8번의 타격왕과 5번의 타점왕, 도루왕 5번 등을 기록하며 당대를 풍미했다. 8번의 타격왕은 타이콥의 12번(혹은 11번)에 이어 역대 2위로, 후에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토니 그윈이 8번 타격왕에 오른다.

발군의 유격수였지만 또한 전천후 선수였던 그는 프로생활 동안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뛰었다. 투수로 나선 경우도 딱 두 번 있었다. (총 9이닝 무실점)와그너는 통산 3할2푼7리에 3415안타, 640개의 2루타와 772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홈런은 101개를 때렸는데 데드볼 시대였던 당시로는 파워도 상당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통계야구인 세이버매트릭스의 대가 빌 제임스는 베이브 루스에 이어 호너스 와그너를 역대 두 번째 위대한 선수로 꼽기도 했다.

1903년 최초의 WS에서 부진해 깊은 상처를 받기도 했던 와 그녀는 35세이던 1909년 두 번째이자 마지막 WS 기회에서 3할 3푼3리에 6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22세의 타이콥을 압도하는 성적으로 우승을 끌어냈다.

은퇴 후 피츠버그 감독에 임명됐지만 5게임 만에 스스로 물러난 와그너는 1933년부터 1952년까지 주로 타격 코치로 피츠버그와 인연을 이어갔다. 파이어리츠가 원정 경기를 가면 팬들의 가장 큰 환대를 받는 인물은 늘 와그너였다.

커다란 스포츠 용품점을 운영하기도 했던 와그너는 주변에서 늘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씨의 할아버지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1955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스포팅 뉴스>가 실시한 야구 역사상 100대 위대한 선수 투표에서 와그너는 13위에 올랐다. 유격수 중에는 최고였다.

생전에 베이브 루스는 자신의 올스타 팀을 선정해 달라는 부탁을 받자 유격수로는 망설이지 않고 와그너를 뽑았다. 루스는 "나의 유격수 후보는 오직 한 명뿐이다. 뛰어난 유격수들이 많았지만 호너스는 그 어떤 선수들보다 월등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사상 최고의 오른손 타자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오늘도 파이어리츠의 홈구장 PNC 파크 앞에는 와그너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구장에 가면 7회초가 끝난 뒤 팬들이 모두 일어나 Take Me Out To The Ball Game (야구장으로 나를 데려가 줘!)'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 라이터이던 잭 노워드는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 북쪽의 폴로그라운드로 향하는 뉴욕 자이언츠 팬들의 흥겨운 모습에 영감을 얻어 이 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야구팬이 아니었다니 아이러니다.

 

본헤드 플레이


 

야구 용어 중에 본헤드 플레이(Bonehead Play)' 라는 것이 있는데,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머리가 깡통 같다는데서 기인한 멍청한 플레이를 뜻한다. 그런데 그 어원이 생겨난 것도 1908년이다.

9월 23일 뉴욕 자이언츠와 시카고 커브스 간에 아주 중요한 경기가 열렸다. 시즌이 며칠 남지 않은 가운데 양 팀은 치열한 페넌트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다. 9회말 동점에서 홈팀 자이언츠가 투아웃에 1, 3루의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알 버드웰의 적시타가 터지면서 자이언츠의 승리가 확정되는 것 같았다. 홈 팬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뛰어든 가운데 커브스의 2루수 조니 에버스는 1루 주자이던 루키 프레드 머클이 기뻐하면서 덕아웃으로 뛰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2루 베이스를 터치하지 않은 것이다. 에버스는 공을 가져다 2루 터치를 하고는 포스아웃이 득점보다 먼저라고 주장, 심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경기는 무승부로 판정나고 말았다.

결국 정규 시즌에 양 팀은 동률을 이뤄 한 게임 플레이오프를 치렀는데 커브스가 4-2로 승리하며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머클은 그 후 14년을 더 빅리그에서 뛰었지만 본헤드(Bonehead)'라는 수치스런 별명을 떨칠 수는 없었다.

1909년에는 당대 최고의 타자이던 디트로이트의 타이 콥과 피츠버그의 호너스 와그너가 WS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격돌했다. 그렇지만 27세의 베이브 애덤스라는 루키 투수가 혼자 3승을 거두며 피츠버그의 4승3패 우승을 이끌어 영웅으로 탄생했다. 콥은 그 후 18년 더 선수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타이 콥

'타격의 신'으로 전설적인 인물인 타이콥의 본명은 타이어스 레이몬드 콥으로 1886년 12월 18일 조지아 주 내로우스에서 태어났다. 타이 콥은 데드볼 시대 최고의 선수였음은 물론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콥은 생애 동안 무려 90개의 MLB 최고 기록을 보유했다. 그 중 생애 통산 타율(3할6푼6리)과 12번의 타격왕 등의 기록들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콥의 이름이 맨 꼭대기에 올라있다. 최다 안타(4191개), 최다 도루(892개) 등의 기록도 그의 은퇴 후 50년 이상 깨지지 않았다. 콥은 3번이나 4할 이상 시즌을 기록했고, 1936년 명예의 전당 개막 행사에서 베이브 루스 등을 제치고 최다 득표로 초대 명예의 전당 멤버 5명 중의 한 명이 됐다.

타이 콥은 그러나 처음부터 발군의 타자는 아니었다. 한 세미프로팀에서는 시즌 개막 이틀 만에 방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패배자로 집에 돌아오지 말라!' 는 아버지 윌리엄 콥의 호된 질책을 받은 후 야구에만 몰두하면서 뛰어난 타자로 거듭났다.

콥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부인이 외도를 한다고 의심했던 윌리엄 콥은 집에 몰래 숨어들어가 증거를 잡으려다가 오히려 강도인줄 알고 놀란 부인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타이 콤은 자신의 야구 인생을 아버지에게 바치겠다며 더욱 운동에만 매진했다.

그는 타격에도 발군이었지만 도루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07년 한 경기에서 2루, 3루, 홈을 연속으로 훔치기도 했다. 심지어는 상대 수비를 혼란시킨다고 3루로 갔다가 2루로 다시 가는 플레이를 해서 역도루를 금지한다는 조항이 콥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콥은 그러나 인종차별주의자에다, 난폭한 플레이를 펼친다는 비난을 들었다. 콥은 은퇴 후에도 주식 투자 등으로 큰돈을 벌었으며 특히 코카콜라사의 주식을 다수 소유하고 있었다. 콥은 196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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