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올림픽 탄생의 역사

동계올림픽 탄생의 역사



동계스포츠 종목의 기원


빙상경기가 스포츠 종목으로 인정된 것은 아주 뒤늦게 이뤄진 일이다. 첫 번째 스포츠는 1607년 컬링이다. 1652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최초의 피겨스케이팅 클럽이 만들어졌다. 1763년에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빙속경기가 열렸다. 이후에 스칸디나비아, 더 정확히 말해 텔레마르크 지방에서 1840년대에 스키점프를 행하는 "나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위업을 이룬 사람은 손레 노르헤임(Sondre Norheim)으로 30.5m의 점프를 해냈다.

동계스포츠 종목의 기원, 여성스키어가 활강하여 내려오는 모습

노르웨이 오슬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인 텔레마르크는 초기 알파인스키어들이 활강 때에 산경사에서 생겨나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 회전을 도는 기술을 개발한 장소로서 그 이름을 길이 전하고 있다. 스키에 대한 흥미로 비롯된 모임과 경기가 빈번해지면서 많은 스키클럽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미래에 큰 클럽으로 발전하게 될 크리스티아나 스키클럽이 이 당시인 1877년 노르웨이의 수도에서 생겨났다. 초창기 스키연맹도 자리를 잡았다. 맨 먼저 1904년에 스위스 연맹이 그리고 1908년에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스키연맹이 결성되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도 생겨났다.

19세기 말에 와서, 스키는 이동과 방어 수단일 뿐 아니라 레저로서 인식되었다. 스키는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운동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노르웨이의 해양 탐험가인 프리티오프 난센(Fridltjof Nansen)이 바로 그런 경우에 든다. 그는 1886년에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그린란드를 횡단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린란드를 가로질러>라는 책을 써서 이 모험을 기록했는데, 그의 업적과 책은 대중들이 스키를 가까이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2년 오슬로 동계올림픽대회에서는 그의 자랑스러운 원정을 높이 기려 손자인 에이길 난센(Eigil Nansen)에게 올림픽성화를 점화하는 영광이 주어졌다. 그에 앞서 1884년에는 란스트보르다(Lans Tvorda)가 220km 경주를 21시간 22분에 주파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런 뛰어난 공적들 덕분에 스키는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는 동시에 하키, 피겨스케이팅 그리고 빙속 등 모든 관련운동이 활성화되었다. 1892년에는 피겨스케이팅과 빙속이 소속된 국제빙상연맹(ISU, International Skating Union)이 창립되었다.

동계올림픽 시대의 위대학 개막, 동계올림픽 주경기장 모습


동계올림픽 시대의 위대한 개막


1894년 프랑스 스포츠체조협회연맹 총회가 열렸을 때,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은 소르본 대학의 대형강의실에서 근대 올림픽대회 재건을 선언하고, 당시 빙상경기의 대중적 인기를 감안하여 총회에서 스케이팅을 올림픽경기로 채택했다. 스키에 관해서는, 1924년 샤모니대회를 기다려야 했다. 2년이 지난 다음인 1896년 4월 6일부터 15일까지 제1회 올림픽대회가 아테네에서 열려, 280명의 선수들이 시합에 참가했다. 2년 전 총회의 결정에 따라, 대회 프로그램 가운데 스케이팅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인공 스케이트장이나 빙판이 준비되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이 경기들은 따로 개최하는 것이 아마도 더 함당할 것으로 보였다. 이처럼 올림픽경기에 빙상스포츠를 포함시키려는 제안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많은 난관이 있었다.

1908년에는 제4차 런던올림픽대회가 4월 27일에서 10월 21일까지 열렸는데, 스케이팅이 올림픽종목에 포함되어 남자, 여자 그리고 혼성 세 가지 형태의 시합이 개최되었다. 프랑스선수는 아무도 이들 시합에 나서지 않았고, 스웨덴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울리히 살차우(Ulrich Salchow)가 그랬고, 여자 개인경기와 혼성경기에서는 독일과 영국이 각각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자신이 쓴 <올림픽 회고록>에서 런던올림픽에 관해 언급하면서 두 기간으로 분리해서 개최한 대회가 만족스럽지 않았음을 밝혔다. 대회는 여름경기와 가을경기를 따로 열었고, 스케이팅은 가을경기에 속했다. 그에 따르면, “만족스런 해결책이 아니다. 하지만 스포츠 시즌에 관해 영국 측의 선입견이 팽배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1912년 7월 5일부터 22일 사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다음 대회에서는 피겨스케이팅이 폐지되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동계대회 개최를 한사코 바라지 않았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1900년 이래 '북구대회'(Jeux du Nord)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개최하고 있는 대회와 경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그 북구대회를 마치 올림픽대회처럼 횟수를 부쳐 '동계대회'라고 부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올림픽 회고록>에서 동계대회가 부딪힌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 '얼음궁전'을 보유한 런던은 1908년 시합을 만족스럽게 개최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12년 스톡홀름 사는 자기들이 스케이팅 시합을 개최하는 데 필요한 기반시설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하게 내세웠다. 그렇게 해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결국 북구대회도 열지 않았다. 쿠베르탱이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된 것이 올림픽 정식종목에 동계스포츠를 포함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보다 많은 나라들이 여기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름 스포츠와 겨울 스포츠를 어떻게 함께 개최한단 말인가? 올림픽 개최국더러 "임시 구입하거나 주문 제작한 산맥을 쌓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하계경기에 이은 일종의 가을 시즌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불편한 점이 많긴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1920년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4월 23일에서 9월 12일에 걸쳐 올림픽대회가 개최되자, 세 가지 유형의 경기를 포함하는 스케이팅 종목이 다시 등장하고, 아이스하키 경기도 함께 열렸다. 프랑스 대표단에 관한 것으로는 그 선수들 가운데에 부부 스케이팅 선수가 포함된 것이 눈에 띄었다. 시몬과 샤를 사부레 부부가 그들이었고, 핀란드 출신의 루도비카와 발테르 야콥손(Ludowika et Waller Jacobsson)이 우승한 혼성경기에서 7위를 차지했다. 프랑스는 또한 아이스하키에도 출전했지만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팀에 속한 대부분 선수들은 1924년 샤모니에서 벌어진 제1회 동계올림픽대회에 참가하여 체코슬로바키아와 동점으로 5위에 올랐다. 금메달은 캐나다 팀에 돌아갔다.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이런 유형의 경기에 점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동계스포츠를 하계대회에 통합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직면한 중요한 걱정거리는 개별 운동 사이에 형평성을 확립하는 문제였다. 이제 동계스포츠는 하계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스웨덴은 다른 나라가 이들 경기를 관리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 원치않았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북구대회를 통해 '백색제전'의 독점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거기에다 그들은 이런 대회를 개최하는 데에 그들만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1921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IOC(Intermational Olympic Committee, 국제올림픽위원회) 제7차 총회에서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노련한 외교술을 발휘하여 동계대회 전문가모임을 주선했다. 총회 막바지에 이르러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 거슬리지 않도록 동계대회를 새로 만들지 않는 대신 오직 '동계스포츠 주간'을 개최하기로 마침내 결정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올림픽 회고록>에 분명히 이렇게 적고 있다: “결국, 만약 프랑스가 올림픽 개최국으로 지명된다면(아직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가 1924년 샤모니에서 '동계스포츠 주간'을 개최할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이 받아들여졌다. 이 행사는 IOC가 주관하되 올림픽대회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이 결정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같이 높은 산에 인접한 많은 나라들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이들 나라들은 동계스포츠에 대단한 열정을 드러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이제 이렇게 적었다. “동계대회는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최할 근거가 마련되었으며, 이들 나라들은 마침내 그들의 고집을 포기하고 특히 스위스와 캐나다를 앞에 두고 그들이 오랫동안 행사해왔다는 사실만으로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의장을 맡은 가운데, 1925년 5월 26일에서 28일까지 프라하 시청에서 IOC 제24차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의 주된 목표는 5월 29일 시작되는 총회에서 논의할 사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5월 27일 수요일 회의 동안, IOC는 동계스포츠 문제를 다루고, 특히 “이들을 별도 기간에 묶는 것을 제안했다. 폴리냑씨가 이같은 계획을 열렬히 지지했다." 오후 회기 동안, IOC의 프랑스 위원인 멜시오르 드 폴리냑 후작은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동계올림픽 헌장을 소개했다. 몇 가지 수정을 거친 다음 헌장은 채택되었다: "IOC는 동계올림픽대회 별도 기간을 마련한다. 이 대회는 올림픽 본 대회와 같은 해에 개최될 것이다. 이 대회는 제1차, 제2차, 제3차 동계올림픽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올림픽 의전의 모든 규칙에 따를 것이다. 상과 메달, 증서 그리고 다양한 자료는 현행 올림피아드를 위해 사용되는 것과는 달라야 될 것이다. '올림피아드'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IOC는 동계올림픽대회가 개최될 장소를 지명하되, 올림피아드 개최국이 동계올림픽대회 전체를 개최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 올림피아드 개최국에 우선권을 갖도록 한다.”

5월 28일 목요일, 회의가 끝난 결과, 앙리 드 바이예라투르 백작이 8년 동안(1925-1933)의 IOC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선거 다음날, 제8차 총회가 1925년 5월 29일부터 6월 4일까지 여전히 프라하에서 진행되었다. 대회의 규칙과 전문기술 문제를 다룰 두 가지 성격의 총회였다. 전문기술 문제를 다룰 총회의 제4위원회가 일정의 열두 번째 안건인 "동계대회에 관한 특별문제, 별도 기간 계획"을 다루도록 되어 있었다. 이 위원회는 클라리 백작이 위원장을 맡고 블로네 남작 등 12명의 위원이 포함되었다.

5월 31일, 프라하 시청에서 제4위원회가 보고서를 총회에 발표했다. 위원회에서 두 가지 중요한 안건이 1표가 모자라는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동계올림픽대회 기간 설정과 1924년 샤모니에서 개최된 동계행사를 '제1회 동계올림픽대회'로 호칭하자는 권고였다. 토론이 벌어진 끝에 총회는 동계올림픽대회 기간 설정을 승인했다. 샤모니 행사에 제1회 동계올림픽대회 명칭을 부여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결정을 표결에 부쳤다. "위원장은 1924년 개최한 샤모니 행사에 "제1회 동계올림픽대회"라는 명칭을 부여하기 위해 IOC에 제출한 권고의 적합성에 관해 표결할 것을 총회에 요청한다."

1926년 리스본에서 열린 제25회 회의에서, IOC 위원들은 5월 6일 목요일 세 가지 중요한 결정을 표결에 부쳤다:
• 192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생모리츠가 지명되었다. [찬성 22표, 기권 1표]
• 1924년 개최된 샤모니 경기에 제1회 동계올림픽대회 명칭을 부여한다.
• 동계올림픽대회 기간은 일요일 두 번을 포함하여 8일로 한정한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공식적으로 1925년 9월 1일 IOC 위원장을 물러나긴 했지만, 이 결정은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계대회는 완전한 승리를 이뤘다.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인 스칸디나비아 동료들이 흔쾌히 합류했다. 나는 동계대회가 반드시 합법적으로 합쳐지는 것을 원해왔기 때문에 이 결과에 만족한다. 하지만 '동계대회헌장'이라는 이름 아래 논란의 소지가 있는 내용을 우리 헌장 속에 포함되도록 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와는 반대로 독립해서 순번 표시하는 것을 막고, 이 대회에 현행 올림피아드 경기 번호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했다."

마침내 동계올림픽이 하계올림픽과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되었다. 치열한 세력다툼을 겪은 다음, 샤모니는 이 지구촌 행사를 최초로 개최한 동계스포츠의 요람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24년은 동계올림픽경기 시대의 위대한 개막을 기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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